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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독일 경제장관 겸 독일 국가은행 총재 발터 풍크 Walther Funk | ||
본명 | <colbgcolor=#ffffff,#191919>Walther Emanuel Funk 발터 에마누엘 풍크 | |
출생 | 1890년 8월 18일 | |
독일국 동프로이센 트라케넨 | ||
사망 | 1960년 5월 31일 (향년 69세) | |
독일 뒤셀도르프 | ||
정당 | ||
시민권 | 독일인 |
발터 에마누엘 풍크 (Walther Emanuel Funk) |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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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프로이센의 트라케넨에서 태어난 풍크는 베를린대와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법률과 경제, 철학을 배운 후 1916년에 보수성향 경제신문인 “베를린 주식신문”에 들어갔다. 경제부문의 편집국장으로 승진한 풍크는 1931년에 나치당에 입당해서 아돌프 히틀러의 경제고문이 되었다.풍크는 대기업을 끌어들여 나치당을 지지하도록 노력했고, 1933년 1월 30일에 히틀러가 수상이 되자 정부수석 보도관으로 임명되어 1933년 3월 2일엔 국민계몽 선전국 차관으로 부임했다. 1937년 11월에는 철강자본을 통괄하는 4개년 계획의 전권책임자인 헤르만 괴링과 대립하던 얄마르 샤흐트가 사퇴하자 헤르만 괴링이 경제장관이 되었지만 1938년 2월 풍크에게 그 자리를 주었다. 풍크는 1939년 1월에 중앙은행 총재로 취임했고 1939년 8월에는 국방각료회의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1943년 9월에 알베르트 슈페어 군수장관의 중앙계획 위원회 위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법정에서의 풍크 |
풍크의 심리분석관이던 구스타프 길버트 대위가 뉘른베르크 재판의 피고 전원을 대상으로 한 지능검사에서 풍크의 IQ는 124였다고 한다.
[1] 여담으로 슈판다우 교도소는 달이 바뀔 때마다 영국, 프랑스, 미국, 소련이 번갈아가며 교도소장부터 말단 인력까지 전부 해당 국가의 인력으로 교체하는 방식으로 관리했는데, 독일에 대한 악감정이 가장 심했던 소련은 수감자에 대한 처우가 가장 박했다. 다른 국가가 담당할 때는 아침 6시에 굳이 딱 맞춰 일어나지 않아도 별다른 제재는 없었는데, 소련이 담당할 때만큼은 아침 6시에 수감자가 일어나 침상을 정리하고 있지 않으면 일어나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고 한다. 발터 풍크는 건강이 가장 좋지 못해 아침잠이 많았고, 소련 관리 하에서 가장 많이 혼났다고 한다.